정전협정, 그리고 6.15남북공동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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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7-28 09:26 조회1,995회 댓글0건본문
<특별기고> 정전협정 58주년을 맞으며
2011년 07월 27일 (수) 09:55:37 노중선 tongil@tongilnews.com
노중선 (통일뉴스 상임고문)
요즘 정권 당국은 남북관계 개선의 절박성과 관련해서 공개·비공개의 방법과 내용을 동원하여 남북 간의 대화 재개를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민족화해와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남북대화라면 단순히 남북의 실무자들이 만나 외교적 절차에 따른 일회적 형식이 아니라 당연히 민족 화해와 협력의 건설적 의미를 담아내고 그 같은 대화를 발전적으로 지속시켜 갈 수 있는 대화로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에 대한 대결적 적대의식부터 불식시키고 그에 따른 실천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대화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듯 우리 민족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민족끼리의 통일 실현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구성원 스스로의 민족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이 필수적 요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걸림돌로 되고 있는 냉전적 정전상태의 극복, 북·미 관계의 개선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
정전협정의 조인과 그 경과
우리가 말하는 ‘정전협정’의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총사령관을 일방으로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을 다른일방으로하는 조선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그리고 ‘정전협정’은 국제연합군총사령관 미육군 대장 마크 W 크라크,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팽덕회 3인이 서명한 회담 문건을 가지고 국제연합대표단 수석대표 미육군 중장 월리암 K 헤리슨, 조선인민군및중국인민지원군대표단 수석대표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이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회의장에서 만나 조인함으로서 정전협정의 효력이 발생하였다.
이 협정문은 먼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범위를 설정하였고, 군사적 접전 상황의 방지를 위해 군사정전위원회 및 중립국감시위원단 등 정전의 구체적인 조치들에 관한 사항,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들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정전협정의 효력 발생 후 3개월 이내에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에 관해 쌍방이 협의할 것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정전협정의 실시 감독, 위반 사건의 협의 처리를 위해 쌍방 각 5명의 고위급 장교들로 군사정전위원회를 구성 운영하였고, 정전협정이 규정한 내용들의 이행 실천을 감독·감시하기 위해 6.25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던 나라들 중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 등 4개국에 의한 중립국감시단 활동도 가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1954년 4월~6월 6.25전쟁 참전 당사국 대표들이 제네바에서 회합할 수 있었다. 이 때 한반도 평화정착 문제와 관련하여 유엔 측은 유엔 감시 하 토착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을 주장하였고, 북측은 외국 무력의 철수 및 남북 군대의 10만 이하 감축에 의한 한반도 평화 정착을 내세웠지만 회담은 진전되지 못했다.
그 이후 전쟁도, 평화도 아닌 불안정한 정전상태의 지속은 우리 민족에게 분단을 강요하는 암울한 현실에서 북측은 기회 있을 때 마다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군사정전위원회의에서 그 같은 내용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북측은 1990년대 초 군사정전위원회의에 불응하면서 중립국감시위원단 무용론을 제기하였다. 이어서 1993년 4월에는 중립국감시위원단의 체코대표단이 철수하였고, 다음해 4월 북측은 대미 직접협상을 요구하고 새로운 평화보장체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군사정전위원회 북측 대표단이 판문점에서 철수하고 독자적으로 개성 지역에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1994년 12월 군사정전위원회 중국대표단이 철수하여 결국 정전협정 이후 41년 동안 한반도 정전체제를 뒷받침해온 군사정전위원회는 그 기능이 완전히 소멸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 같은 결과는 당시(1994년 12월 17일) 미군 헬기가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 불시착한 사건이 발생해서도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한 해결이 아니라 주한미군사령관이 직접 북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유사한 사고의 재발 대책을 강구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서 해결해야했던 것에서도 군사정전위원회가 자기역할을 하고 있지 못함이 확인되었다.
이렇게 되자 1995년 2월 중립국감독위원단의 폴란드 대표단 철수와 함께 북측은 중립국감시위원단 사무실도 폐쇄하였고, 1996년에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유지·관리 의무 포기를 선언하고 공동경비구역 내에 무장병력을 투입하였다. 그 뒤 1998년 6월부터는 북측의 인민군판문점대표부와 유엔군사령부 간의 장성급 회담을 통해서 현재의 정전상황은 군사정전회의와는 관계없이 필요에 따라 변칙적으로 대좌하고 있는 현실에서 북·미간에는 하루빨리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 내야만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국제정치적 역학관계에서도 더 이상 정전협정이 존속될 명분은 없다. 6.25전쟁 당시 적대적 참전국들 간에도 대화는 물론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남과 북이 각각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1991년 9월)하였으며, 남북기본합의서(1992년 2월) 5조에서 “남과 북은 현 정전상태로 남북사이의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라고 합의 한 바도 있다. 뿐만 아니라 한·중수교(1992년 8월)가 이루어졌으며 북·미 간 제네바합의(1994년 10월)에서는 쌍방 간에 연락사무소 개설문제를 합의하여 그 구체적 실행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정전협정 문제는 형식적으로나 실제에 있어서 북·미간의 문제임을 부인하기는 어렵고 하루 빨리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어야 마땅하다.
북·미관계의 갈등과 발전
북과 미국의 관계는 6.25전쟁과정에서 불구대천의 적대 관계로 되었고 그동안 그 연장선 상에서 정전협정의 실질적 당사자로서의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한 적대적 대화 상대일 뿐이었다.
그렇게 20여년이 지난 1974년 3월 북측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대미 평화회담을 제기하였다. 당시 7.4공동성명에 의한 남북관계 개선과 관련하여 군비축소를 통해 남북 간 평화가 정착되어야 하는데 군사문제와 관련해서는 남한에서 군사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평화문제를 협의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미국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였고 다시 14년이 지난 1988년 10월에서야 ①미국인의 북측 지역 여행 완화 및 학술·문화 등 비정치적 교류 허용 ②식량·약품 등 인도적 차원의 교역 허가 ③북측 외교관과의 비공식 대화 허용 등 대북 완화 외교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해 12월 북경에서 북·미 간 참사관급 첫 접촉이 이루어짐으로서 북·미관계 개선 논의는 태동되었다.
그리하여 1989년 1월 두 번째 참사관급 접촉 이후 1993년 9월에 이르는 약 5년 기간에 34차례의 북·미 간 참사관급 접촉을 통해 북·미 간 대화와 회담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북·미 간의 관계 개선 문제를 비롯하여 핵 문제, 고위급 회담 개최 문제 등 북·미 간 여러 현안 문제들이 논의되었고 그 결과에 따라 미국은 1992년 팀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도 했고, 북측은 전쟁 이후 그 때까지 연례적으로 진행 해오던 ‘반미집회’를 1993년에는 취소하기도 했다.
이 같은 쌍방 간의 유화적 국면은 1994년에 이르러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북은 IAEA의 핵사찰 수용, 북·미 간 고위급회담 개최, 남북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회담 등 4개항을 합의하는 한편 연락사무소 개설문제와 관련한 협의를 위해 미 공식대표단이 처음으로 방북(1994. 9.10~13)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 해 10월에는 북핵 동결, 대북 경수로 지원,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 등 북·미관계 개선을 골자로 한 기본합의서(북·미 간 제네바합의)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95년 1월 대북제재 45년만의 부분해제를 통해 북·미 간 직통전화가 개설되고, 쌍방 간 언론기관사무소 개설이 허용되었다. 또한 1991년 영변 핵단지 문제로 북·미 간 핵협상이 부각된 이래 1993년 5월 예비회담 등 북·미 간 핵 협상이 타결되기도 했고, 1995년 6월 북·미 간 준고위급회담에서 경수로 관련 문제가 완전 합의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0년 남북 간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직후 10월에는 북의 조명록 차수가 미국을 방문하여 북·미 간 전면적 관계개선 검토, 정전협정의 평화보장 체계로 전환, 적대관계 종식, 경제협조 교류 증진을 골자로 하는 북·미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되돌아 볼 때 북·미관계는 냉전 시대에는 화해 불능의 적대적 갈등관계가 지속되었으나 탈냉전 이후 시기에는 관계 발전을 통한 상생의 길을 모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북·미관계가 느슨하게나마 발전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미국은 북과 관련해서 BDA 문제, 테러지원국 명단 문제 등을 제기하여 북·미관계는 반전과 난항을 거듭하면서 일시적으로 정체 현상을 보이고는 있지만 북·미관계는 분명히 정상화의 길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결국 북·미관계 발전의 최종단계는 곧 한반도에서 불안정한 정전상태 즉 적대적 전쟁상태의 지속을 마감하는 평화보장책을 강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북·미 간의 평화협정 체결 여부는 한반도 평화정착의 핵심이며 북·미관계 정상화의 시금석으로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6.15남북공동선언 실천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의 땅, 한반도에서만 전 세계의 어느 지역에도 존재하지 않는 냉전의 유물이 아직도 잔존해 있다. 정전협정이 58년 동안이나 그대로 있고 그에 따라 북·미 간에는 외교 관계조차 수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에로의 전환 그리고 북·미관계의 정상화는 곧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기도 하고 동북아의 평화를 담보하는 필수적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객관적 조건들이 충족된다고 해서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우리 민족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 조건의 성숙과 함께 남·북간의 민족화해와 협력이라는 주관적 요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반도 평화 정착과 우리 민족의 통일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구성원 스스로가 자기의 문제를 자기 책임아래 주도해 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민족끼리의 화해와 협력이 선행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여기에서 6.15남북공동선언의 성실한 이행 실천이 절실하게 요구되며 그것은 분단 상황의 우리들 민족구성원 모두의 의무이고 책임이기도 하다.
6.15남북공동선언은 실재하는 남과 북의 당국 간 합의를 이루어 발표되었다는 점, 분단 현실에 기초하여 적대적 대결상태의 아픔을 딛고 ‘우리민족끼리’를 내세워 상호실체 존중 방식으로 민족 내부 문제를 극복하여 민족화해 협력을 약속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기로 한 점은 그것이 비록 완결적 통일방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늘의 냉전적 분단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통일의 장전’이라 할만하다.
따라서 정권 당국이 6.15남북공동선언 이행 실천을 게을리 한다면 통일을 갈망하는 다수 민족구성원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이의 실천을 촉구하고 압박해야 한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서 정당이든 후보자든 6.15공동선언 이행 실천을 확약하는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선출해야 한다.
바야흐로 정전협정이라는 낡은 역사를 극복하고, 우리민족끼리의 새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6.15공동선언을 이행 실천하는 일에 우리 모두는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할 시점에 이르러 있다.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2011년 07월 27일 (수) 09:55:37 노중선 tongil@tongilnews.com
노중선 (통일뉴스 상임고문)
요즘 정권 당국은 남북관계 개선의 절박성과 관련해서 공개·비공개의 방법과 내용을 동원하여 남북 간의 대화 재개를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민족화해와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남북대화라면 단순히 남북의 실무자들이 만나 외교적 절차에 따른 일회적 형식이 아니라 당연히 민족 화해와 협력의 건설적 의미를 담아내고 그 같은 대화를 발전적으로 지속시켜 갈 수 있는 대화로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에 대한 대결적 적대의식부터 불식시키고 그에 따른 실천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대화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듯 우리 민족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민족끼리의 통일 실현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구성원 스스로의 민족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이 필수적 요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걸림돌로 되고 있는 냉전적 정전상태의 극복, 북·미 관계의 개선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
정전협정의 조인과 그 경과
우리가 말하는 ‘정전협정’의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총사령관을 일방으로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을 다른일방으로하는 조선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그리고 ‘정전협정’은 국제연합군총사령관 미육군 대장 마크 W 크라크,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팽덕회 3인이 서명한 회담 문건을 가지고 국제연합대표단 수석대표 미육군 중장 월리암 K 헤리슨, 조선인민군및중국인민지원군대표단 수석대표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이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회의장에서 만나 조인함으로서 정전협정의 효력이 발생하였다.
이 협정문은 먼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범위를 설정하였고, 군사적 접전 상황의 방지를 위해 군사정전위원회 및 중립국감시위원단 등 정전의 구체적인 조치들에 관한 사항,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들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정전협정의 효력 발생 후 3개월 이내에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에 관해 쌍방이 협의할 것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정전협정의 실시 감독, 위반 사건의 협의 처리를 위해 쌍방 각 5명의 고위급 장교들로 군사정전위원회를 구성 운영하였고, 정전협정이 규정한 내용들의 이행 실천을 감독·감시하기 위해 6.25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던 나라들 중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 등 4개국에 의한 중립국감시단 활동도 가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1954년 4월~6월 6.25전쟁 참전 당사국 대표들이 제네바에서 회합할 수 있었다. 이 때 한반도 평화정착 문제와 관련하여 유엔 측은 유엔 감시 하 토착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을 주장하였고, 북측은 외국 무력의 철수 및 남북 군대의 10만 이하 감축에 의한 한반도 평화 정착을 내세웠지만 회담은 진전되지 못했다.
그 이후 전쟁도, 평화도 아닌 불안정한 정전상태의 지속은 우리 민족에게 분단을 강요하는 암울한 현실에서 북측은 기회 있을 때 마다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군사정전위원회의에서 그 같은 내용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북측은 1990년대 초 군사정전위원회의에 불응하면서 중립국감시위원단 무용론을 제기하였다. 이어서 1993년 4월에는 중립국감시위원단의 체코대표단이 철수하였고, 다음해 4월 북측은 대미 직접협상을 요구하고 새로운 평화보장체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군사정전위원회 북측 대표단이 판문점에서 철수하고 독자적으로 개성 지역에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1994년 12월 군사정전위원회 중국대표단이 철수하여 결국 정전협정 이후 41년 동안 한반도 정전체제를 뒷받침해온 군사정전위원회는 그 기능이 완전히 소멸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 같은 결과는 당시(1994년 12월 17일) 미군 헬기가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 불시착한 사건이 발생해서도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한 해결이 아니라 주한미군사령관이 직접 북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유사한 사고의 재발 대책을 강구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서 해결해야했던 것에서도 군사정전위원회가 자기역할을 하고 있지 못함이 확인되었다.
이렇게 되자 1995년 2월 중립국감독위원단의 폴란드 대표단 철수와 함께 북측은 중립국감시위원단 사무실도 폐쇄하였고, 1996년에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유지·관리 의무 포기를 선언하고 공동경비구역 내에 무장병력을 투입하였다. 그 뒤 1998년 6월부터는 북측의 인민군판문점대표부와 유엔군사령부 간의 장성급 회담을 통해서 현재의 정전상황은 군사정전회의와는 관계없이 필요에 따라 변칙적으로 대좌하고 있는 현실에서 북·미간에는 하루빨리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 내야만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국제정치적 역학관계에서도 더 이상 정전협정이 존속될 명분은 없다. 6.25전쟁 당시 적대적 참전국들 간에도 대화는 물론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남과 북이 각각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1991년 9월)하였으며, 남북기본합의서(1992년 2월) 5조에서 “남과 북은 현 정전상태로 남북사이의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라고 합의 한 바도 있다. 뿐만 아니라 한·중수교(1992년 8월)가 이루어졌으며 북·미 간 제네바합의(1994년 10월)에서는 쌍방 간에 연락사무소 개설문제를 합의하여 그 구체적 실행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정전협정 문제는 형식적으로나 실제에 있어서 북·미간의 문제임을 부인하기는 어렵고 하루 빨리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어야 마땅하다.
북·미관계의 갈등과 발전
북과 미국의 관계는 6.25전쟁과정에서 불구대천의 적대 관계로 되었고 그동안 그 연장선 상에서 정전협정의 실질적 당사자로서의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한 적대적 대화 상대일 뿐이었다.
그렇게 20여년이 지난 1974년 3월 북측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대미 평화회담을 제기하였다. 당시 7.4공동성명에 의한 남북관계 개선과 관련하여 군비축소를 통해 남북 간 평화가 정착되어야 하는데 군사문제와 관련해서는 남한에서 군사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평화문제를 협의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미국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였고 다시 14년이 지난 1988년 10월에서야 ①미국인의 북측 지역 여행 완화 및 학술·문화 등 비정치적 교류 허용 ②식량·약품 등 인도적 차원의 교역 허가 ③북측 외교관과의 비공식 대화 허용 등 대북 완화 외교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해 12월 북경에서 북·미 간 참사관급 첫 접촉이 이루어짐으로서 북·미관계 개선 논의는 태동되었다.
그리하여 1989년 1월 두 번째 참사관급 접촉 이후 1993년 9월에 이르는 약 5년 기간에 34차례의 북·미 간 참사관급 접촉을 통해 북·미 간 대화와 회담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북·미 간의 관계 개선 문제를 비롯하여 핵 문제, 고위급 회담 개최 문제 등 북·미 간 여러 현안 문제들이 논의되었고 그 결과에 따라 미국은 1992년 팀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도 했고, 북측은 전쟁 이후 그 때까지 연례적으로 진행 해오던 ‘반미집회’를 1993년에는 취소하기도 했다.
이 같은 쌍방 간의 유화적 국면은 1994년에 이르러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북은 IAEA의 핵사찰 수용, 북·미 간 고위급회담 개최, 남북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회담 등 4개항을 합의하는 한편 연락사무소 개설문제와 관련한 협의를 위해 미 공식대표단이 처음으로 방북(1994. 9.10~13)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 해 10월에는 북핵 동결, 대북 경수로 지원,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 등 북·미관계 개선을 골자로 한 기본합의서(북·미 간 제네바합의)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95년 1월 대북제재 45년만의 부분해제를 통해 북·미 간 직통전화가 개설되고, 쌍방 간 언론기관사무소 개설이 허용되었다. 또한 1991년 영변 핵단지 문제로 북·미 간 핵협상이 부각된 이래 1993년 5월 예비회담 등 북·미 간 핵 협상이 타결되기도 했고, 1995년 6월 북·미 간 준고위급회담에서 경수로 관련 문제가 완전 합의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0년 남북 간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직후 10월에는 북의 조명록 차수가 미국을 방문하여 북·미 간 전면적 관계개선 검토, 정전협정의 평화보장 체계로 전환, 적대관계 종식, 경제협조 교류 증진을 골자로 하는 북·미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되돌아 볼 때 북·미관계는 냉전 시대에는 화해 불능의 적대적 갈등관계가 지속되었으나 탈냉전 이후 시기에는 관계 발전을 통한 상생의 길을 모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북·미관계가 느슨하게나마 발전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미국은 북과 관련해서 BDA 문제, 테러지원국 명단 문제 등을 제기하여 북·미관계는 반전과 난항을 거듭하면서 일시적으로 정체 현상을 보이고는 있지만 북·미관계는 분명히 정상화의 길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결국 북·미관계 발전의 최종단계는 곧 한반도에서 불안정한 정전상태 즉 적대적 전쟁상태의 지속을 마감하는 평화보장책을 강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북·미 간의 평화협정 체결 여부는 한반도 평화정착의 핵심이며 북·미관계 정상화의 시금석으로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6.15남북공동선언 실천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의 땅, 한반도에서만 전 세계의 어느 지역에도 존재하지 않는 냉전의 유물이 아직도 잔존해 있다. 정전협정이 58년 동안이나 그대로 있고 그에 따라 북·미 간에는 외교 관계조차 수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에로의 전환 그리고 북·미관계의 정상화는 곧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기도 하고 동북아의 평화를 담보하는 필수적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객관적 조건들이 충족된다고 해서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우리 민족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 조건의 성숙과 함께 남·북간의 민족화해와 협력이라는 주관적 요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반도 평화 정착과 우리 민족의 통일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구성원 스스로가 자기의 문제를 자기 책임아래 주도해 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민족끼리의 화해와 협력이 선행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여기에서 6.15남북공동선언의 성실한 이행 실천이 절실하게 요구되며 그것은 분단 상황의 우리들 민족구성원 모두의 의무이고 책임이기도 하다.
6.15남북공동선언은 실재하는 남과 북의 당국 간 합의를 이루어 발표되었다는 점, 분단 현실에 기초하여 적대적 대결상태의 아픔을 딛고 ‘우리민족끼리’를 내세워 상호실체 존중 방식으로 민족 내부 문제를 극복하여 민족화해 협력을 약속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기로 한 점은 그것이 비록 완결적 통일방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늘의 냉전적 분단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통일의 장전’이라 할만하다.
따라서 정권 당국이 6.15남북공동선언 이행 실천을 게을리 한다면 통일을 갈망하는 다수 민족구성원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이의 실천을 촉구하고 압박해야 한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서 정당이든 후보자든 6.15공동선언 이행 실천을 확약하는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선출해야 한다.
바야흐로 정전협정이라는 낡은 역사를 극복하고, 우리민족끼리의 새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6.15공동선언을 이행 실천하는 일에 우리 모두는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할 시점에 이르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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