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도 과감하게 비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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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4-05 09:16 조회989회 댓글0건본문
창간 10주년 맞은 <민족21> 정창현 대표
2011년 04월 04일 (월) 00:46:44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늦봄이라는 호처럼 문익환 목사님은 뒤늦게 통일운동에 뛰어들어 기여하셨지만 ‘청년 문익환’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청년 문익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앞으로 <민족21>이 10년 됐지만 좀더 젊은 세대들과 호흡하는 <민족21>이 되라는 격려가 아니겠느냐 생각한다.”
창간 10주년을 맞은 월간 <민족21>의 정창현 대표는 ‘늦봄 통일상’ 수상 소감을 묻자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늦봄 통일상이 가장 받고 싶은 상이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달 31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창현 대표는 “즐거운 마음에서 10주년을 자축하고 축하받는 분위기여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오히려 창간 당시보다 남북관계가 후퇴하고 나빠진 상황이 마음 아프다”며 “나름의 역사적인 역할을 일정 부분 했고, 지난 시기 보다는 앞으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산을 마련한 10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실제로 <민족21>은 2001년 창간호부터 역사상 처음으로 북측 <통일신보>와 기사교류를 시작했고, 가장 많은 단독 방북 취재를 통해 북한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알리는데 앞장서왔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일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16회 ‘늦봄 통일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것.
<민족21>은 오는 6일 오후 6시 30분부터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리는 창간 10주년 기념행사에서 후원회(회장 박창일 신부)를 처음으로 선보이며, 각 지역별 운영위원들도 소개할 예정이다.
정창현 대표는 <민족21>의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북측지역 취재영역의 확대와 북쪽이 개선해야 할 점들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대안제시, 그리고 3,40대와 쉽게 소통할 수 있는 내용 개발, 국제적 시각 확보 등을 꼽았다.
특히 “10년간의 신뢰를 기초로 해서 북쪽에서 고쳐야 될 부분은 과감하게 비판도 하고 대안도 제시하고 조언도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며 “북쪽이라는 사회가 완벽한 사회가 아니고 여러 문제점이 있고 남북간의 교류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경직된 태도라든지 소모적인 잘못된 관행 같은 것이 있다”고 짚었다.
정 대표는 앞으로 다양한 형태의 통일교육 교재 발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대학에서 강의할 때 쓸 수 있는 교재 형식의 북한 현대사 강좌용”과 “학술적이기 보다는 쉽게 북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대중용 역사서”를 발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북한문제 전문가인 정 대표는 “북이 핵포기를 선언하고 프로세스를 밟아가는 과정과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동시 논의되고 평화협정을 담보할 수 있는 동북아 평화협력기구 구성이라는 두 가지 프로세스가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북핵 폐기는 가능하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또한 “앞으로 6자회담이 상반기 안으로 재개될 가능성 크다고 보는데, 6자회담이 재개되면 결국 북핵 폐기가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평화협정 문제가 구체적 현안으로 등장할 것”이라며 “북미관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권이 바뀌더라도 합의를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에 대해 한.미.일 공동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남측 자본주의 사회와는 다른 사회주의 의사결정 구조와 원칙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며 “북쪽의 행동이나 정책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북측 자체 논리구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정권수립 이후에 어떤 역사적 과정과 발전전략을 통해서 지금까지 왔는지를 이해해야 지금의 북한과 앞으로의 북한이 어떻게 나갈 것인지, 왜 북한이 3대 계승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거시적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로 결혼 19년인데 이틀 연속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어본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다”는 정 대표는 “<민족21> 만들고 글을 쓰고 민족문제에 대해서 강연을 하는 것이 당위적인 사명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떻게 보면 개인적으로는 재밌다. 그 자체가 내 인생의 40대를 결산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신수동 <민족21>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전문이다.
“10주년 기념해 전국적인 후원회 결성”
□ 통일뉴스 : 월간 <민족21>이 창간 10주년을 맞았는데 소감은?
■ 정창현 대표 : 즐거운 마음에서 10주년을 자축하고 축하받는 분위기여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오히려 창간 당시보다 남북관계가 후퇴하고 나빠진 상황이 마음 아프다는 게 일차적 소감이다.
<민족21> 초창기에 남북의 마음을 열고, 남북을 잇는 잡지 역할을 하겠다고 표방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남북관계가 ‘교류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국지전이 나느냐 마느냐’, 평화가 더 중요한 문제로 됐다.
두 번째로는 그래도 척박한 한국의 상황, 어려운 잡지계의 상황을 딛고 <민족21>이 두 차례 정도 폐간될 위기상황까지 간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남북관계와 관계없이 그나마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면서 10주년 맞게 됐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나름의 역사적인 역할을 일정 부분 했고, 지난 시기 보다는 앞으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산을 마련한 10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 창간 10주년 기념행사는 어떻게 진행되나?
■ 10주년을 맞아서 정세 토론회도 열려고 했는데, 지난 100호 발간 기념 정세토론 했던 때와 지금 정세가 거의 변한 것이 없다. 또 다시 한반도 위기를 이야기하고 남북관계를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뜻 깊은 행사를 하기 어려워 안타깝다.
통상적으로 10주년을 축하하는 일반적인 행사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념식을 6일 오후 6시 반에 백범기념관에서 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다.
그동안 <민족21>이 여러 분들의 지지와 격려, 후원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앞으로 <민족21>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통일교육 교재를 출간한다든지 이런 다양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단위에서 움직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다.
10주년을 기념해 처음으로 전국적인 후원회 조직을 결성하고 운영위원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가질까 생각하고 있다. 후원회 회장으로는 박창일 신부님이 흔쾌히 맡아주셨고, 운영위원장은 광주 강위원 관장이 맡아주기로 했다. 각 도별로 운영위원들을 선임한다.
앞으로 이 후원회를 통해 얻어지는 재정이나 이런 부분들을 남북관계나 통일교육에 필요한 교재를 개발하고, 강좌를 열고, 젊은 세대들한테 통일의 중요성을 알리는 사업들을 해나가는데 활용할까 생각하고 있다.
□ 지난 10년을 운영해 오는 과정에서 <민족21>의 중요한 결절점 내지는 전환점이 있었다면?
■ <민족21>이 초창기에 의욕적으로 창간돼서 북쪽을 보는 시각을 바꾸고, 북쪽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이 남쪽 잡지에 처음으로 실리면서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주고, ‘아, 이런 교류도 가능하구나’ 하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민족21>이 남북관계의 상황에 따라서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에 10개월 정도 남북관계가 중단됐을 때, 그때가 <민족21>로서는 경제적으로나 남북교류, 북쪽 취재에 있어서 위기 국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런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을 세우고 대중적인 측면과 전문적인 측면을 결합해서 새롭게 가는 전환기가 된 것이 대체로 2005년이다. 명진 스님이 제 2대 발행인으로 들어오고 2006년 3월에 <민족21>이 기획 방북 취재를 하면서 제 2기랄까, 새로운 전환이 마련됐다.
그것이 대외적으로 나타난 것이 2007년 5월에 <일간스포츠>와 공동으로 ‘평양-남포 자전거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남쪽의 150여 분을 모시고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북쪽 주요시설을 돌아보는 행사를 했던 것이 <민족21>로서는 대외적인 영향력을 강화하고 접촉면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아무래도 기사교류하고 쓰는 것 보다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평양에 가서 움직이는 이런 것이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다.
“사람냄새가 배어있는 취재를 하자”
□ 지난 10년을 되돌아볼 때 아쉬움이 남는 점이 있다면?
■ <민족21>이 처음 창간돼서 북쪽 <통일신보>와 교류를 시작했는데, 정식으로 문서상으로 ‘남북 언론교류 합의서’를 만든 것은 5년이 지난 2006년 3월이다. 북쪽을 이해하려고 하는 교류와 협력의 자세를 갖고 있는 <민족21>도 5년이 지나 신뢰관계가 확인된 뒤에야 공적인 합의를 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도 2년 정도가 지난 2008년 정도 돼서야 <민족21>이 원하는 취재 방향에 대해 북측이 전면 수용했는데, 그것이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면서 하나도 실현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북쪽하고 합의된 것은 크게 보면 세 가지다.
하나는 취재 영역의 다양화다. 과거의 북쪽 취재가 주요 시설을 방문하고 일방적으로 설명 듣는 형식이었다고 하면, 폭을 넓혀서 공장도 가보고 협동농장도 방문해보고 취재영역을 넓히자는 합의를 했다.
두 번째는 몇 년째 요구했던 것이 사람냄새가 배어있는 취재를 하자는 것이다. 개선문을 취재할 때도 일방적으로 해설강사의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설강사의 삶, 일상적인 모습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개선문에 접근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 또 북쪽의 일반인 집에 방문해서 실제로 취재하는 작업도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북쪽도 어렵게 논쟁을 거쳐 수용했다.
세 번째는 평양과 평양 인근에 주로 취재지가 몰려 있는데 함경도의 칠보산이라든지 다른 외곽에 있는 전국적 범위 내에서 취재 영역을 확대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북쪽이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방북승인이 나지 않으면서 합의들을 실제로 지키지 못한 것인데, 앞으로 우리가 남북교류와 북쪽 취재를 갔을 때 주력하고 싶은 부분이다.
□ <민족21>은 ‘남북이 함께 보는 잡지’에서 ‘남북해외가 함께 보는 잡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 정도로 북과 해외에서도 널리 읽히는 것으로 안다. 해외 취재를 나가거나 반응이 온 경우들이 있나?
■ 민족문제가 결국 6자회담 체제가 가동되면서 상당히 국제화될 수 밖에 없는 조건이 됐다고 본다. <민족21>도 2008년부터 그 이전과 달리 미국이나 일본, 중국 취재를 강화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일환으로 미국 유력 학자나 중국 사회과학원이나 주요 대학의 전문가를 인터뷰하는 작업을 순차적으로 해왔다.
인상적인 일로는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에번스 리비어 회장 방에 들어가니까 <민족21>이 꽂혀있는 것을 봤다. 해외에서도 한반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민족21>의 존재감이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일본 같은 경우는 <조선신보>와 총련 산하 ‘사협’(재일본조선사회과학자협회)에 있는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북쪽의 주요한 현안들을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계기들을 가질 수 있었다.
□ 그간 기억나는 특종이나 특별한 분석글로 각광을 받은 일이 있다면?
■ 첫 번째 특종은 2002년에 <민족21>이 당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관계자 묘역을 방문한 것이다. 전쟁시기에 북으로 간 분들이 실제로 어디에 어떻게 묻혀있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당시 2개로 나눠진 특설묘역을 방문해서 사진을 다 찍어 보도했다. 거기에 묻혀있는 분들 명단도 처음으로 공개했다.
남쪽 가족들의 전화를 굉장히 많이 받았고 그게 계기가 돼서 두 묘역이 재북인사묘로 통합이 되고 보충, 후속보도가 이루어지고 2006년 가족들이 평양을 방문해서 재북인사묘를 참배하는 성과로까지 이어졌다. 분단과 남북관계 차원에서 가슴에 와 닿는 특종이었다.
그 다음에 김정은 후계자 보도를 냄으로써 상당한 비판도 받고 항의 전화도 받고, ‘남쪽에서 주요한 현안인데 보도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여러 가지 논란을 불러일으킨 기사였다.
세계적인 석학 노암 촘스키 교수를 인터뷰했을 때 그 노학자가 갖고 있는 겸손함이 참 감동적이었다.
2009년 경우는 북의 2차 핵실험과 로켓 발사로 인해 긴장국면으로 갔을 때 ‘북쪽이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할 것이다. 고위급 회담을 통해 국면전환을 하반기에 할 것이다’라는 보도를 내보냈는데 결과적으로 그 시기에서 보면 그러한 방향이 맞았다고 볼 수 있다.
“북쪽에서 고쳐야 될 부분은 과감하게 비판도”
□ 최근 대북매체들이 ‘아니면 말고’ 식의 확인되지 않은 북한에 대한 부정적 보도들을 쏟아내고 있다. 어떻게 보나?
■ 한국 사회에서 <민족21>이 지난 10년간 역할을 한 부분이 북쪽의 일상적인 모습을 균형감 있게 보도했다고 본다. <민족21> 자체만 보면 균형감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의 어려운 생활,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기사, 사진, 동영상은 얼마든지 많다. 북쪽 사회에도 정말 다양한 모습이 있고, 북쪽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있는데, 그런 모습들은 전혀 그동안 남쪽에 소개되지 못했다. <민족21>이 창간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북쪽의 다른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한국사회에 균형적인 대북관을 형성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최근 확인되지 않은 첩보성 기사들이 인터넷 매체나 보수언론을 통해 확산되고 있고, 그것이 이미지로 굳어져서 정부의 대북정책, 대북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됐다. 결국 북쪽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너무나 한쪽으로 편향돼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색안경을 끼고 북쪽에서 나오는 이야기나 현상들을 봤을 때 모두다 부정적이고 그것을 일반화 하는 오류에 빠지고 있다.
그래서 <민족21>을 비롯해서 북쪽을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매체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석도 잘해야겠지만 먼저 북쪽의 주요한 정책이나 현상들을 정확하게 보도할 수 있는 체계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 앞으로 <민족21>의 과제는?
■ 창간 10주년을 넘어가면서 앞으로 주력해야 될 부분을 많이 고민하게 된다.
첫 번째는 북쪽과의 상당한 신뢰가 형성돼 있다고 보여지고, 그에 기초해서 남쪽이 좀더 이해하기 쉬운 남쪽 사람이 궁금해 하는 그런 영역의 취재를 확대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풀려 방북이 가능하다면 훨씬 밀착된 특집기사나 기획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10년간의 신뢰를 기초로 해서 북쪽에서 고쳐야 될 부분은 과감하게 비판도 하고 대안도 제시하고 조언도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북쪽이라는 사회가 완벽한 사회가 아니고 여러 문제점이 있고 남북간의 교류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경직된 태도라든지 소모적인 잘못된 관행 같은 것이 있다. 북쪽의 남북관계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읽는 <민족21>에서 그런 역할을 앞으로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세 번째는 <민족21>의 독자 방향과 관련된 것인데, 이른바 ‘486세대’가 50대에 진입하고, 3,40대 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제 사회의 중견이 되고 있는 전대협.한총련 세대들이 생활 속에서 민족문제 통일문제를 이해하고 아이들에게 통일.민족 문제를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앞으로 3,40대와 보다 쉽게 소통할 수 있는 방향으로 편집과 기사 방향을 잡아나가려고 한다.
네 번째는 해외 통신원이나 해외의 전문 학자들의 견해를 많이 소개해서 국제적으로 남북문제, 통일문제에 대한 시각의 폭을 넓히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
□ 북쪽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꼽았는데, 북측도 남쪽과 만나고 교류하면서 많이 바뀌었다고 보나?
■ 지난번에 우리 대표단이 여러 명 갔을 때 북쪽의 안내하러 나온 사람이 남쪽 나이드신 분들에 대해 약간 반말 비슷하게 한 게 있다. 북측 어투가 원래 약간 반말투로 들리는 게 있다. 나이 드신 분이 불쾌하게 생각해 얘기했더니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이렇게 얘기한다. 그 사람 입장에서도 바쁘고 많은 사람 관리해야 하고.
그런 이야기를 나중에 북쪽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 얘기했더니 당장 정색을 하고 “누구냐? 누군지 모르면 어떤 행사에 있었던 일인가를 알려주면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이 안 일어나도록 조치하겠다”고 하더라.
북쪽이 남쪽과의 교류 상황에서 어려움이나 서로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점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고치려고 하는 자세로 변화해가는 것이 아닌가 경험하게 되고,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북쪽이 고쳐야 될 문제들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도 있다.
북쪽의 일상적 생활이나 시스템 속에서만 보면 남쪽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남북교류에 필요한 사항이라면 <민족21>이 적극적으로 앞으로 문제제기를 해서 이런 관행은 고치자든지 북쪽의 이런 태도는 이런 방향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적극적인 대안을 내는 것도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형태의 통일교육 교재 발행” 계획
□ 월간지인데다 재미없는 남북문제를 다루니 재정문제가 가중될 것으로 짐작된다.
■ 역설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 더 어려웠다고 본다. 왜냐하면 정부당국 중심으로 남북관계가 가다보니까 금방 다 해결될 듯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통일이나 북한전문 잡지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였다고 본다. 오히려 남북관계가 어려워지니까 어떤 측면에서는 왜 이런가를 보려는 사람들이 늘어난 측면도 있다.
전반적으로 잡지 시장이 축소되면서 독자가 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후원회도 재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우선은 독자를 늘리되 지방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많이 보게 하는 측면을 강조하고 싶다.
앞으로 <민족21>의 재정은 기획출판이나 프로젝트 수행을 통해서 조금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통일교육 교재를 발행하려 한다. 지난 10년간 <민족21>이 찍은 사진, 축적한 기사를 활용해서 한국사회에 균형잡힌 시각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일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사진들을 통해 북쪽을 보여줘야 통일을 쉽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이런 북쪽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기획서들을 준비하고 있다.
북쪽을 접근하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가, 북쪽 도서관을 알고 싶다고 했을 때 편견을 가지고 보면 거의 이용자가 없고 낙후돼 있다는 시각이 먼저다. 그것 보다는 북쪽 도서관 정책이 어떻고 각 구역별로 도서관이 마련돼 있고, 이런 전반적인 접근을 통해서 ‘북쪽 도서관 정책이 남쪽과 다른 것은 뭔가, 남북의 다름이 어떻게 구체적 현실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교재를 고민하고 있다. 그래야만 과거의 통일교재와 달리 쉽게 학생이나 대중들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최근 고 박병엽 선생이 구술한 북한 현대사를 시리즈로 발간하고 있는데.
■ 박병엽 선생은 80년대에 들어오신 분인데, 북쪽에 있을 때 남북교류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 북쪽 현대사나 남북교류에 굉장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9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내용을 소개하는 작업을 늦었지만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은 해방부터 북한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다양한 이야기를 하나로 엮었고, 그 정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움직였던 정치인들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 홍명희 등의 상호관계를 엮어서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이라는 두 번째 책을 냈다. 앞으로 두 권 정도가 더 나올 예정이고, 남북대화나 남북관계의 여러 비화들을 담은 책이 될 것이다.
최근에 『인물로 본 북한 현대사』를 냈는데, 북한의 역사나 인물을 정통 역사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을 통해서, 기록을 통해서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는 형태다.
앞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책을 내고 싶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쓸 수 있는 교재 형식의 북한 현대사 강좌용이고, 또 하나는 학술적이기 보다는 쉽게 북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대중용 역사서 이런 쪽을 좀 내볼까 생각하고 있다.
□ 고 박병엽 선생의 구술 내용이 기존 북한 현대사 연구와 어떤 차이나 특성이 있나?
■ 기록에 안 나오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다. 공개되지 않은 물밑접촉은 공개하기 어렵고 기록에도 안 남아 있다.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풍부한 내용이 굉장히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박병엽 선생이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등장하고 후계체계가 수립되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70년대의 북한의 정치적 움직임이 거의 공백상태로 있었는데 그 내용들이 증언을 통해 일정하게 알려지고 지금은 학계에서도 상당히 일반화된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대단히 구체적이다. 사건이면 사건, 인물이면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싶을 정도다. 문서가 꼭 역사를 반영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체험이 어쩌면 공식화된 문서보다 역사를 잘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증언이다.
북핵 폐기, 평화협정 체결과 동북아 평화협력기구 구성 병행해야
□ 북한이란 자주성을 견지하는 나라라는 긍정적 이미지도 있지만, 지속적인 경제난과 후계문제 등 부정적 이미지도 상당하다. 북한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 북한을 볼 때 크게 보면 두 가지 점에 주목해야.
첫 번째 남측 자본주의 사회와는 다른 사회주의 의사결정 구조와 원칙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북쪽의 행동이나 정책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북측 자체 논리구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두 번째로 역사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정권수립 이후에 어떤 역사적 과정과 발전전략을 통해서 지금까지 왔는지를 이해해야 지금의 북한과 앞으로의 북한이 어떻게 나갈 것인지, 왜 북한이 3대 계승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거시적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북핵 문제가 핵심 쟁점이라고 본다. 북한이 과연 모든 핵을 다 포기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일부 핵 프로그램에 대해 협상하려고 하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 개인적으로 북의 핵무기라고 하는 것은 양 측면을 갖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황금도끼다. 황금도끼가 값어치 나가고 집안에 걸어두면 빛이 나지만 실제로 나무를 찍는데 사용할 수는 없다. 실제로 북이 핵을 갖고 있지만 보유하려고 하느냐 협상용이냐 하면 협상용이라고 볼 여지가 강하다고 본다.
두 번째는 북이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북이 한반도에서의 정세를 완화하고 평화지향적으로 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냈다는 측면이다.
북쪽에서 장기적으로 보면 협상과정에서 핵폐기를 선언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전제가 있다. 한.미.일이 선핵 폐기를 요구하는데 그런 형태를 북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이 핵포기를 선언하고 프로세스를 밟아가는 과정과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동시 논의되고 평화협정을 담보할 수 있는 동북아 평화협력기구 구성이라는 두 가지 프로세스가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북핵 폐기는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북쪽의 한반도 비핵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논의는 당국 차원에서 굉장히 활성화 됐는데, 북쪽과 함께 논의해야할 평화체제와 동북아평화체제, 그 핵심사안인 북미관계와 북일관계 정상화를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는 준비가 부족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6자회담이 상반기 안으로 재개될 가능성 크다고 보는데 6자회담이 재개되면 결국 북핵 폐기가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평화협정 문제가 구체적 현안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보여진다.
가장 논란되는 측면은 북핵 폐기라고 하는 것은 비가역적이고 불가역성을 가지고 있다. 한번 폐기하고 시멘트를 바르든지 핵물질을 해외로 반출할 경우 절대는 아니지만 상당기간 불가역성을 가진다.
그런데 평화협정과 북미관계 정상화는 언제든지 처음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2000년 이후 10년간을 보면 클린턴 대통령과의 합의가 부시 대통령에 의해 뒤집어지고, 부시 정부 안에서도 후반기에 다시 뒤집어지고 남쪽도 정권교체로 이전 합의가 전혀 이행 안 되는 상황이 계속 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미.일이 정말로 한반도를 비핵화하고 북핵 폐기 의지를 갖고 있다면 북이 북핵 폐기를 결심할 수 있고 그런 프로세스로 가기 위한 신뢰관계, 북미관계로 이야기하면 북미관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권이 바뀌더라도 합의를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에 대해 한.미.일 공동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현실적 방안으로 동북아 평화안보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다자적인 관점이 나오는 이유가 그런데 있다.
결론적으로 한반도 비핵화는 이뤄질 수 있는 목표다. 북쪽 내부 정권이나 체제 변화와 관계없이 가능한 목표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북핵 폐기를 가져올 수 있는 필요한 프로세스가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뒤 준수가 돼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가능한 목표다.
□ 북.중 동맹이 강화되는 등 예전에 비해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 생각을 바꿔야 되는 부분이 과거에는 미국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북쪽도 모든 관계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다른 것은 부차로 봤다면, 2009년 2010년 지나면서 달라진 것 아닌가 본다.
G2시대의 동북아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세계 최강 반열로 성장한 중국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북쪽을 안정화시키는 것인가. 그런 논쟁의 결과가 두 차례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북.중 전략연대를 강화한다고 하는 것은 한반도 비핵화 측면에서 보면 장기적으로 유리한 측면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좀더 단계를 나눠 본다면 지금 6자회담이 열리면 IAEA 사찰단이 북한을 방문하고, 핵 추가개발 중단을 선언하고, 미사일 발사 중단을 선언하고 폐연료봉을 해외로 가져가는 것은 언제든지 실현 가능한 방안이고, 어느 정도 북.중과 미.중간 합의된 상태가 아닌가 본다. 그 단계까지는 쉽게 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우라늄 문제나 북쪽 핵능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문제는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다. 한.미.일이 합당한 절차들을 진행해야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내에 북핵 폐기를 이끌어내겠다고 하는 것은 정세 흐름에서 보면 굉장히 위험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정책밖에 안 된다.
“빠른 시간 내에 세대교체 해야”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이번에 <민족21>이 ‘늦봄 통일상’을 수상한 것을 축하한다. 이 상을 준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나?
■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늦봄 통일상이 가장 받고 싶은 상이었고, 그런 측면에서 기쁘다고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더 잘해야 한다는 채찍으로 느껴진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의 기본적인 생각은 85년 민통련이 만들어질 때 민주.민중.민족 3가지 방향이 기본적이었다고 생각하고, 3단계 통일방안이 <민족21>이 지향하는 바와 일치하고 있다. 늦봄 통일상을 받게 된 것은 앞으로 <민족21>이 민족문제에 대해 더 고민하고 활발하게 활동하라는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늦봄이라는 호처럼 문익환 목사님은 뒤늦게 통일운동에 뛰어들어 기여하셨지만 ‘청년 문익환’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청년 문익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앞으로 <민족21>이 10년 됐지만, 좀더 젊은 세대들과 호흡하는 <민족21>이 되라는 격려가 아니겠느냐 생각한다.
□ 지난 10년간 개인사에 대해서 평가한다면?
■ 개인적으로 역사를 전공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역사과를 가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던 것 같다. 집에서는 법대 가라는 요구가 강했지만 역사학과를 갔고, 역사 공부가 재미있어서 대학원 가게 됐고, 대학원 마치고 시간강사를 하다가 광복 50주년 특집을 기획하면서 <중앙일보>에서 현대사 전문기자 요구가 들어왔다. 독특한 계기가 돼 <중앙일보>에 입사하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연구자의 길에서 신문 기자의 길로 예상 못한 변경이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몇 년 정도 하면 다시 연구자의 길로 돌아오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지만, 현대사를 연재하다가 결국 북한 문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남북관계를 다루는 쪽으로 가게 됐고, 그 기간에 남북정상회담을 겪게 되고, 만 10년 1개월이라는 생각 못한 긴 시간을 <중앙일보>에 몸담게 됐다.
얻은 것은 한국사회에서 주류 언론의 메카니즘을 훈련받고 알아가는 굉장히 많은 것을 배운 시기였다. 잃은 것은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역사연구하고는 거리가 멀어진 것이었다.
<민족21>은 창간 과정부터 관여했고, 처음 잡지 제호를 제가 <민족21>로 제안해서 창간 준비하는 분들 사이에 합의됐다. 그 이후 <중앙일보>에 있으면서도 꾸준히 <민족21>에 글을 실었고, <민족21>이 방북취재 갈 때 동행해 갈 때도 많았다.
창간부터 친근한 매체였고, 새롭게 출범하는 2기 체제, 발행인이 초대 강만길 선생에서 명진 스님으로 바뀌면서 편집주간으로 합류하면서 <민족21>을 맡아보게 된 거다. 6년째 접어들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새로운 세대를 양성하는 과정을 겪어서 세대교체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올해로 결혼 19년인데 이틀 연속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어본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다. 19년동안 새해 1월 1일 외박한 게 10번은 된 것 같다. <중앙일보>에 있을 때 원래 토요일이 쉬는 날인데 토요일 대부분을 출근했던 것 같다. 출근해야만 내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민족21>에 들어와서는 더 심해진 것 같다. 한달에 한번 정도 가족이 식사한 적도 있는 것 같다. 가족들에게는 미안하다. 그래도 <민족21> 만들고 글을 쓰고 민족문제에 대해서 강연을 하는 것이 당위적인 사명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떻게 보면 개인적으로는 재밌다. 그 자체가 내 인생의 40대를 결산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생각한다.
□ 이 기회를 빌어 같이 해오신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 <민족21> 10년 동안에 열정을 바쳐서 함께 하셨던 분들이 참 많다. 초대 신준영 편집국장, 2대 김지형 편집국장, 안영민 편집주간, 정용일 편집국장 등 헌신적인 노력 하나하나가 모여지고 그동안 <민족21>을 거쳐 간 많은 기자들의 헌신을 통해 오늘까지 올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민족21>을 지키고 좀더 좋은 잡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전현직 기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 외에 여려가지 어려운 조건이 있지만 창간 초기부터 지금까지 편집기획위원 참여해주면서 조언과 자문을 해주신 전문가와 학자들에게도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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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4월 04일 (월) 00:46:44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늦봄이라는 호처럼 문익환 목사님은 뒤늦게 통일운동에 뛰어들어 기여하셨지만 ‘청년 문익환’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청년 문익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앞으로 <민족21>이 10년 됐지만 좀더 젊은 세대들과 호흡하는 <민족21>이 되라는 격려가 아니겠느냐 생각한다.”
창간 10주년을 맞은 월간 <민족21>의 정창현 대표는 ‘늦봄 통일상’ 수상 소감을 묻자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늦봄 통일상이 가장 받고 싶은 상이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달 31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창현 대표는 “즐거운 마음에서 10주년을 자축하고 축하받는 분위기여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오히려 창간 당시보다 남북관계가 후퇴하고 나빠진 상황이 마음 아프다”며 “나름의 역사적인 역할을 일정 부분 했고, 지난 시기 보다는 앞으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산을 마련한 10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실제로 <민족21>은 2001년 창간호부터 역사상 처음으로 북측 <통일신보>와 기사교류를 시작했고, 가장 많은 단독 방북 취재를 통해 북한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알리는데 앞장서왔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일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16회 ‘늦봄 통일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것.
<민족21>은 오는 6일 오후 6시 30분부터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리는 창간 10주년 기념행사에서 후원회(회장 박창일 신부)를 처음으로 선보이며, 각 지역별 운영위원들도 소개할 예정이다.
정창현 대표는 <민족21>의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북측지역 취재영역의 확대와 북쪽이 개선해야 할 점들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대안제시, 그리고 3,40대와 쉽게 소통할 수 있는 내용 개발, 국제적 시각 확보 등을 꼽았다.
특히 “10년간의 신뢰를 기초로 해서 북쪽에서 고쳐야 될 부분은 과감하게 비판도 하고 대안도 제시하고 조언도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며 “북쪽이라는 사회가 완벽한 사회가 아니고 여러 문제점이 있고 남북간의 교류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경직된 태도라든지 소모적인 잘못된 관행 같은 것이 있다”고 짚었다.
정 대표는 앞으로 다양한 형태의 통일교육 교재 발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대학에서 강의할 때 쓸 수 있는 교재 형식의 북한 현대사 강좌용”과 “학술적이기 보다는 쉽게 북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대중용 역사서”를 발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북한문제 전문가인 정 대표는 “북이 핵포기를 선언하고 프로세스를 밟아가는 과정과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동시 논의되고 평화협정을 담보할 수 있는 동북아 평화협력기구 구성이라는 두 가지 프로세스가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북핵 폐기는 가능하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또한 “앞으로 6자회담이 상반기 안으로 재개될 가능성 크다고 보는데, 6자회담이 재개되면 결국 북핵 폐기가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평화협정 문제가 구체적 현안으로 등장할 것”이라며 “북미관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권이 바뀌더라도 합의를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에 대해 한.미.일 공동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남측 자본주의 사회와는 다른 사회주의 의사결정 구조와 원칙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며 “북쪽의 행동이나 정책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북측 자체 논리구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정권수립 이후에 어떤 역사적 과정과 발전전략을 통해서 지금까지 왔는지를 이해해야 지금의 북한과 앞으로의 북한이 어떻게 나갈 것인지, 왜 북한이 3대 계승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거시적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로 결혼 19년인데 이틀 연속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어본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다”는 정 대표는 “<민족21> 만들고 글을 쓰고 민족문제에 대해서 강연을 하는 것이 당위적인 사명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떻게 보면 개인적으로는 재밌다. 그 자체가 내 인생의 40대를 결산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신수동 <민족21>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전문이다.
“10주년 기념해 전국적인 후원회 결성”
□ 통일뉴스 : 월간 <민족21>이 창간 10주년을 맞았는데 소감은?
■ 정창현 대표 : 즐거운 마음에서 10주년을 자축하고 축하받는 분위기여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오히려 창간 당시보다 남북관계가 후퇴하고 나빠진 상황이 마음 아프다는 게 일차적 소감이다.
<민족21> 초창기에 남북의 마음을 열고, 남북을 잇는 잡지 역할을 하겠다고 표방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남북관계가 ‘교류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국지전이 나느냐 마느냐’, 평화가 더 중요한 문제로 됐다.
두 번째로는 그래도 척박한 한국의 상황, 어려운 잡지계의 상황을 딛고 <민족21>이 두 차례 정도 폐간될 위기상황까지 간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남북관계와 관계없이 그나마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면서 10주년 맞게 됐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나름의 역사적인 역할을 일정 부분 했고, 지난 시기 보다는 앞으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산을 마련한 10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 창간 10주년 기념행사는 어떻게 진행되나?
■ 10주년을 맞아서 정세 토론회도 열려고 했는데, 지난 100호 발간 기념 정세토론 했던 때와 지금 정세가 거의 변한 것이 없다. 또 다시 한반도 위기를 이야기하고 남북관계를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뜻 깊은 행사를 하기 어려워 안타깝다.
통상적으로 10주년을 축하하는 일반적인 행사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념식을 6일 오후 6시 반에 백범기념관에서 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다.
그동안 <민족21>이 여러 분들의 지지와 격려, 후원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앞으로 <민족21>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통일교육 교재를 출간한다든지 이런 다양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단위에서 움직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다.
10주년을 기념해 처음으로 전국적인 후원회 조직을 결성하고 운영위원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가질까 생각하고 있다. 후원회 회장으로는 박창일 신부님이 흔쾌히 맡아주셨고, 운영위원장은 광주 강위원 관장이 맡아주기로 했다. 각 도별로 운영위원들을 선임한다.
앞으로 이 후원회를 통해 얻어지는 재정이나 이런 부분들을 남북관계나 통일교육에 필요한 교재를 개발하고, 강좌를 열고, 젊은 세대들한테 통일의 중요성을 알리는 사업들을 해나가는데 활용할까 생각하고 있다.
□ 지난 10년을 운영해 오는 과정에서 <민족21>의 중요한 결절점 내지는 전환점이 있었다면?
■ <민족21>이 초창기에 의욕적으로 창간돼서 북쪽을 보는 시각을 바꾸고, 북쪽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이 남쪽 잡지에 처음으로 실리면서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주고, ‘아, 이런 교류도 가능하구나’ 하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민족21>이 남북관계의 상황에 따라서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에 10개월 정도 남북관계가 중단됐을 때, 그때가 <민족21>로서는 경제적으로나 남북교류, 북쪽 취재에 있어서 위기 국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런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을 세우고 대중적인 측면과 전문적인 측면을 결합해서 새롭게 가는 전환기가 된 것이 대체로 2005년이다. 명진 스님이 제 2대 발행인으로 들어오고 2006년 3월에 <민족21>이 기획 방북 취재를 하면서 제 2기랄까, 새로운 전환이 마련됐다.
그것이 대외적으로 나타난 것이 2007년 5월에 <일간스포츠>와 공동으로 ‘평양-남포 자전거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남쪽의 150여 분을 모시고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북쪽 주요시설을 돌아보는 행사를 했던 것이 <민족21>로서는 대외적인 영향력을 강화하고 접촉면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아무래도 기사교류하고 쓰는 것 보다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평양에 가서 움직이는 이런 것이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다.
“사람냄새가 배어있는 취재를 하자”
□ 지난 10년을 되돌아볼 때 아쉬움이 남는 점이 있다면?
■ <민족21>이 처음 창간돼서 북쪽 <통일신보>와 교류를 시작했는데, 정식으로 문서상으로 ‘남북 언론교류 합의서’를 만든 것은 5년이 지난 2006년 3월이다. 북쪽을 이해하려고 하는 교류와 협력의 자세를 갖고 있는 <민족21>도 5년이 지나 신뢰관계가 확인된 뒤에야 공적인 합의를 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도 2년 정도가 지난 2008년 정도 돼서야 <민족21>이 원하는 취재 방향에 대해 북측이 전면 수용했는데, 그것이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면서 하나도 실현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북쪽하고 합의된 것은 크게 보면 세 가지다.
하나는 취재 영역의 다양화다. 과거의 북쪽 취재가 주요 시설을 방문하고 일방적으로 설명 듣는 형식이었다고 하면, 폭을 넓혀서 공장도 가보고 협동농장도 방문해보고 취재영역을 넓히자는 합의를 했다.
두 번째는 몇 년째 요구했던 것이 사람냄새가 배어있는 취재를 하자는 것이다. 개선문을 취재할 때도 일방적으로 해설강사의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설강사의 삶, 일상적인 모습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개선문에 접근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 또 북쪽의 일반인 집에 방문해서 실제로 취재하는 작업도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북쪽도 어렵게 논쟁을 거쳐 수용했다.
세 번째는 평양과 평양 인근에 주로 취재지가 몰려 있는데 함경도의 칠보산이라든지 다른 외곽에 있는 전국적 범위 내에서 취재 영역을 확대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북쪽이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방북승인이 나지 않으면서 합의들을 실제로 지키지 못한 것인데, 앞으로 우리가 남북교류와 북쪽 취재를 갔을 때 주력하고 싶은 부분이다.
□ <민족21>은 ‘남북이 함께 보는 잡지’에서 ‘남북해외가 함께 보는 잡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 정도로 북과 해외에서도 널리 읽히는 것으로 안다. 해외 취재를 나가거나 반응이 온 경우들이 있나?
■ 민족문제가 결국 6자회담 체제가 가동되면서 상당히 국제화될 수 밖에 없는 조건이 됐다고 본다. <민족21>도 2008년부터 그 이전과 달리 미국이나 일본, 중국 취재를 강화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일환으로 미국 유력 학자나 중국 사회과학원이나 주요 대학의 전문가를 인터뷰하는 작업을 순차적으로 해왔다.
인상적인 일로는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에번스 리비어 회장 방에 들어가니까 <민족21>이 꽂혀있는 것을 봤다. 해외에서도 한반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민족21>의 존재감이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일본 같은 경우는 <조선신보>와 총련 산하 ‘사협’(재일본조선사회과학자협회)에 있는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북쪽의 주요한 현안들을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계기들을 가질 수 있었다.
□ 그간 기억나는 특종이나 특별한 분석글로 각광을 받은 일이 있다면?
■ 첫 번째 특종은 2002년에 <민족21>이 당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관계자 묘역을 방문한 것이다. 전쟁시기에 북으로 간 분들이 실제로 어디에 어떻게 묻혀있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당시 2개로 나눠진 특설묘역을 방문해서 사진을 다 찍어 보도했다. 거기에 묻혀있는 분들 명단도 처음으로 공개했다.
남쪽 가족들의 전화를 굉장히 많이 받았고 그게 계기가 돼서 두 묘역이 재북인사묘로 통합이 되고 보충, 후속보도가 이루어지고 2006년 가족들이 평양을 방문해서 재북인사묘를 참배하는 성과로까지 이어졌다. 분단과 남북관계 차원에서 가슴에 와 닿는 특종이었다.
그 다음에 김정은 후계자 보도를 냄으로써 상당한 비판도 받고 항의 전화도 받고, ‘남쪽에서 주요한 현안인데 보도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여러 가지 논란을 불러일으킨 기사였다.
세계적인 석학 노암 촘스키 교수를 인터뷰했을 때 그 노학자가 갖고 있는 겸손함이 참 감동적이었다.
2009년 경우는 북의 2차 핵실험과 로켓 발사로 인해 긴장국면으로 갔을 때 ‘북쪽이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할 것이다. 고위급 회담을 통해 국면전환을 하반기에 할 것이다’라는 보도를 내보냈는데 결과적으로 그 시기에서 보면 그러한 방향이 맞았다고 볼 수 있다.
“북쪽에서 고쳐야 될 부분은 과감하게 비판도”
□ 최근 대북매체들이 ‘아니면 말고’ 식의 확인되지 않은 북한에 대한 부정적 보도들을 쏟아내고 있다. 어떻게 보나?
■ 한국 사회에서 <민족21>이 지난 10년간 역할을 한 부분이 북쪽의 일상적인 모습을 균형감 있게 보도했다고 본다. <민족21> 자체만 보면 균형감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의 어려운 생활,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기사, 사진, 동영상은 얼마든지 많다. 북쪽 사회에도 정말 다양한 모습이 있고, 북쪽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있는데, 그런 모습들은 전혀 그동안 남쪽에 소개되지 못했다. <민족21>이 창간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북쪽의 다른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한국사회에 균형적인 대북관을 형성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최근 확인되지 않은 첩보성 기사들이 인터넷 매체나 보수언론을 통해 확산되고 있고, 그것이 이미지로 굳어져서 정부의 대북정책, 대북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됐다. 결국 북쪽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너무나 한쪽으로 편향돼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색안경을 끼고 북쪽에서 나오는 이야기나 현상들을 봤을 때 모두다 부정적이고 그것을 일반화 하는 오류에 빠지고 있다.
그래서 <민족21>을 비롯해서 북쪽을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매체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석도 잘해야겠지만 먼저 북쪽의 주요한 정책이나 현상들을 정확하게 보도할 수 있는 체계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 앞으로 <민족21>의 과제는?
■ 창간 10주년을 넘어가면서 앞으로 주력해야 될 부분을 많이 고민하게 된다.
첫 번째는 북쪽과의 상당한 신뢰가 형성돼 있다고 보여지고, 그에 기초해서 남쪽이 좀더 이해하기 쉬운 남쪽 사람이 궁금해 하는 그런 영역의 취재를 확대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풀려 방북이 가능하다면 훨씬 밀착된 특집기사나 기획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10년간의 신뢰를 기초로 해서 북쪽에서 고쳐야 될 부분은 과감하게 비판도 하고 대안도 제시하고 조언도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북쪽이라는 사회가 완벽한 사회가 아니고 여러 문제점이 있고 남북간의 교류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경직된 태도라든지 소모적인 잘못된 관행 같은 것이 있다. 북쪽의 남북관계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읽는 <민족21>에서 그런 역할을 앞으로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세 번째는 <민족21>의 독자 방향과 관련된 것인데, 이른바 ‘486세대’가 50대에 진입하고, 3,40대 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제 사회의 중견이 되고 있는 전대협.한총련 세대들이 생활 속에서 민족문제 통일문제를 이해하고 아이들에게 통일.민족 문제를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앞으로 3,40대와 보다 쉽게 소통할 수 있는 방향으로 편집과 기사 방향을 잡아나가려고 한다.
네 번째는 해외 통신원이나 해외의 전문 학자들의 견해를 많이 소개해서 국제적으로 남북문제, 통일문제에 대한 시각의 폭을 넓히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
□ 북쪽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꼽았는데, 북측도 남쪽과 만나고 교류하면서 많이 바뀌었다고 보나?
■ 지난번에 우리 대표단이 여러 명 갔을 때 북쪽의 안내하러 나온 사람이 남쪽 나이드신 분들에 대해 약간 반말 비슷하게 한 게 있다. 북측 어투가 원래 약간 반말투로 들리는 게 있다. 나이 드신 분이 불쾌하게 생각해 얘기했더니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이렇게 얘기한다. 그 사람 입장에서도 바쁘고 많은 사람 관리해야 하고.
그런 이야기를 나중에 북쪽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 얘기했더니 당장 정색을 하고 “누구냐? 누군지 모르면 어떤 행사에 있었던 일인가를 알려주면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이 안 일어나도록 조치하겠다”고 하더라.
북쪽이 남쪽과의 교류 상황에서 어려움이나 서로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점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고치려고 하는 자세로 변화해가는 것이 아닌가 경험하게 되고,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북쪽이 고쳐야 될 문제들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도 있다.
북쪽의 일상적 생활이나 시스템 속에서만 보면 남쪽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남북교류에 필요한 사항이라면 <민족21>이 적극적으로 앞으로 문제제기를 해서 이런 관행은 고치자든지 북쪽의 이런 태도는 이런 방향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적극적인 대안을 내는 것도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형태의 통일교육 교재 발행” 계획
□ 월간지인데다 재미없는 남북문제를 다루니 재정문제가 가중될 것으로 짐작된다.
■ 역설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 더 어려웠다고 본다. 왜냐하면 정부당국 중심으로 남북관계가 가다보니까 금방 다 해결될 듯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통일이나 북한전문 잡지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였다고 본다. 오히려 남북관계가 어려워지니까 어떤 측면에서는 왜 이런가를 보려는 사람들이 늘어난 측면도 있다.
전반적으로 잡지 시장이 축소되면서 독자가 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후원회도 재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우선은 독자를 늘리되 지방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많이 보게 하는 측면을 강조하고 싶다.
앞으로 <민족21>의 재정은 기획출판이나 프로젝트 수행을 통해서 조금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통일교육 교재를 발행하려 한다. 지난 10년간 <민족21>이 찍은 사진, 축적한 기사를 활용해서 한국사회에 균형잡힌 시각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일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사진들을 통해 북쪽을 보여줘야 통일을 쉽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이런 북쪽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기획서들을 준비하고 있다.
북쪽을 접근하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가, 북쪽 도서관을 알고 싶다고 했을 때 편견을 가지고 보면 거의 이용자가 없고 낙후돼 있다는 시각이 먼저다. 그것 보다는 북쪽 도서관 정책이 어떻고 각 구역별로 도서관이 마련돼 있고, 이런 전반적인 접근을 통해서 ‘북쪽 도서관 정책이 남쪽과 다른 것은 뭔가, 남북의 다름이 어떻게 구체적 현실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교재를 고민하고 있다. 그래야만 과거의 통일교재와 달리 쉽게 학생이나 대중들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최근 고 박병엽 선생이 구술한 북한 현대사를 시리즈로 발간하고 있는데.
■ 박병엽 선생은 80년대에 들어오신 분인데, 북쪽에 있을 때 남북교류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 북쪽 현대사나 남북교류에 굉장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9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내용을 소개하는 작업을 늦었지만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은 해방부터 북한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다양한 이야기를 하나로 엮었고, 그 정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움직였던 정치인들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 홍명희 등의 상호관계를 엮어서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이라는 두 번째 책을 냈다. 앞으로 두 권 정도가 더 나올 예정이고, 남북대화나 남북관계의 여러 비화들을 담은 책이 될 것이다.
최근에 『인물로 본 북한 현대사』를 냈는데, 북한의 역사나 인물을 정통 역사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을 통해서, 기록을 통해서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는 형태다.
앞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책을 내고 싶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쓸 수 있는 교재 형식의 북한 현대사 강좌용이고, 또 하나는 학술적이기 보다는 쉽게 북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대중용 역사서 이런 쪽을 좀 내볼까 생각하고 있다.
□ 고 박병엽 선생의 구술 내용이 기존 북한 현대사 연구와 어떤 차이나 특성이 있나?
■ 기록에 안 나오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다. 공개되지 않은 물밑접촉은 공개하기 어렵고 기록에도 안 남아 있다.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풍부한 내용이 굉장히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박병엽 선생이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등장하고 후계체계가 수립되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70년대의 북한의 정치적 움직임이 거의 공백상태로 있었는데 그 내용들이 증언을 통해 일정하게 알려지고 지금은 학계에서도 상당히 일반화된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대단히 구체적이다. 사건이면 사건, 인물이면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싶을 정도다. 문서가 꼭 역사를 반영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체험이 어쩌면 공식화된 문서보다 역사를 잘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증언이다.
북핵 폐기, 평화협정 체결과 동북아 평화협력기구 구성 병행해야
□ 북한이란 자주성을 견지하는 나라라는 긍정적 이미지도 있지만, 지속적인 경제난과 후계문제 등 부정적 이미지도 상당하다. 북한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 북한을 볼 때 크게 보면 두 가지 점에 주목해야.
첫 번째 남측 자본주의 사회와는 다른 사회주의 의사결정 구조와 원칙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북쪽의 행동이나 정책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북측 자체 논리구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두 번째로 역사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정권수립 이후에 어떤 역사적 과정과 발전전략을 통해서 지금까지 왔는지를 이해해야 지금의 북한과 앞으로의 북한이 어떻게 나갈 것인지, 왜 북한이 3대 계승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거시적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북핵 문제가 핵심 쟁점이라고 본다. 북한이 과연 모든 핵을 다 포기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일부 핵 프로그램에 대해 협상하려고 하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 개인적으로 북의 핵무기라고 하는 것은 양 측면을 갖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황금도끼다. 황금도끼가 값어치 나가고 집안에 걸어두면 빛이 나지만 실제로 나무를 찍는데 사용할 수는 없다. 실제로 북이 핵을 갖고 있지만 보유하려고 하느냐 협상용이냐 하면 협상용이라고 볼 여지가 강하다고 본다.
두 번째는 북이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북이 한반도에서의 정세를 완화하고 평화지향적으로 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냈다는 측면이다.
북쪽에서 장기적으로 보면 협상과정에서 핵폐기를 선언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전제가 있다. 한.미.일이 선핵 폐기를 요구하는데 그런 형태를 북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이 핵포기를 선언하고 프로세스를 밟아가는 과정과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동시 논의되고 평화협정을 담보할 수 있는 동북아 평화협력기구 구성이라는 두 가지 프로세스가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북핵 폐기는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북쪽의 한반도 비핵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논의는 당국 차원에서 굉장히 활성화 됐는데, 북쪽과 함께 논의해야할 평화체제와 동북아평화체제, 그 핵심사안인 북미관계와 북일관계 정상화를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는 준비가 부족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6자회담이 상반기 안으로 재개될 가능성 크다고 보는데 6자회담이 재개되면 결국 북핵 폐기가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평화협정 문제가 구체적 현안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보여진다.
가장 논란되는 측면은 북핵 폐기라고 하는 것은 비가역적이고 불가역성을 가지고 있다. 한번 폐기하고 시멘트를 바르든지 핵물질을 해외로 반출할 경우 절대는 아니지만 상당기간 불가역성을 가진다.
그런데 평화협정과 북미관계 정상화는 언제든지 처음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2000년 이후 10년간을 보면 클린턴 대통령과의 합의가 부시 대통령에 의해 뒤집어지고, 부시 정부 안에서도 후반기에 다시 뒤집어지고 남쪽도 정권교체로 이전 합의가 전혀 이행 안 되는 상황이 계속 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미.일이 정말로 한반도를 비핵화하고 북핵 폐기 의지를 갖고 있다면 북이 북핵 폐기를 결심할 수 있고 그런 프로세스로 가기 위한 신뢰관계, 북미관계로 이야기하면 북미관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권이 바뀌더라도 합의를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에 대해 한.미.일 공동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현실적 방안으로 동북아 평화안보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다자적인 관점이 나오는 이유가 그런데 있다.
결론적으로 한반도 비핵화는 이뤄질 수 있는 목표다. 북쪽 내부 정권이나 체제 변화와 관계없이 가능한 목표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북핵 폐기를 가져올 수 있는 필요한 프로세스가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뒤 준수가 돼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가능한 목표다.
□ 북.중 동맹이 강화되는 등 예전에 비해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 생각을 바꿔야 되는 부분이 과거에는 미국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북쪽도 모든 관계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다른 것은 부차로 봤다면, 2009년 2010년 지나면서 달라진 것 아닌가 본다.
G2시대의 동북아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세계 최강 반열로 성장한 중국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북쪽을 안정화시키는 것인가. 그런 논쟁의 결과가 두 차례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북.중 전략연대를 강화한다고 하는 것은 한반도 비핵화 측면에서 보면 장기적으로 유리한 측면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좀더 단계를 나눠 본다면 지금 6자회담이 열리면 IAEA 사찰단이 북한을 방문하고, 핵 추가개발 중단을 선언하고, 미사일 발사 중단을 선언하고 폐연료봉을 해외로 가져가는 것은 언제든지 실현 가능한 방안이고, 어느 정도 북.중과 미.중간 합의된 상태가 아닌가 본다. 그 단계까지는 쉽게 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우라늄 문제나 북쪽 핵능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문제는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다. 한.미.일이 합당한 절차들을 진행해야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내에 북핵 폐기를 이끌어내겠다고 하는 것은 정세 흐름에서 보면 굉장히 위험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정책밖에 안 된다.
“빠른 시간 내에 세대교체 해야”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이번에 <민족21>이 ‘늦봄 통일상’을 수상한 것을 축하한다. 이 상을 준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나?
■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늦봄 통일상이 가장 받고 싶은 상이었고, 그런 측면에서 기쁘다고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더 잘해야 한다는 채찍으로 느껴진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의 기본적인 생각은 85년 민통련이 만들어질 때 민주.민중.민족 3가지 방향이 기본적이었다고 생각하고, 3단계 통일방안이 <민족21>이 지향하는 바와 일치하고 있다. 늦봄 통일상을 받게 된 것은 앞으로 <민족21>이 민족문제에 대해 더 고민하고 활발하게 활동하라는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늦봄이라는 호처럼 문익환 목사님은 뒤늦게 통일운동에 뛰어들어 기여하셨지만 ‘청년 문익환’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청년 문익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앞으로 <민족21>이 10년 됐지만, 좀더 젊은 세대들과 호흡하는 <민족21>이 되라는 격려가 아니겠느냐 생각한다.
□ 지난 10년간 개인사에 대해서 평가한다면?
■ 개인적으로 역사를 전공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역사과를 가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던 것 같다. 집에서는 법대 가라는 요구가 강했지만 역사학과를 갔고, 역사 공부가 재미있어서 대학원 가게 됐고, 대학원 마치고 시간강사를 하다가 광복 50주년 특집을 기획하면서 <중앙일보>에서 현대사 전문기자 요구가 들어왔다. 독특한 계기가 돼 <중앙일보>에 입사하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연구자의 길에서 신문 기자의 길로 예상 못한 변경이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몇 년 정도 하면 다시 연구자의 길로 돌아오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지만, 현대사를 연재하다가 결국 북한 문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남북관계를 다루는 쪽으로 가게 됐고, 그 기간에 남북정상회담을 겪게 되고, 만 10년 1개월이라는 생각 못한 긴 시간을 <중앙일보>에 몸담게 됐다.
얻은 것은 한국사회에서 주류 언론의 메카니즘을 훈련받고 알아가는 굉장히 많은 것을 배운 시기였다. 잃은 것은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역사연구하고는 거리가 멀어진 것이었다.
<민족21>은 창간 과정부터 관여했고, 처음 잡지 제호를 제가 <민족21>로 제안해서 창간 준비하는 분들 사이에 합의됐다. 그 이후 <중앙일보>에 있으면서도 꾸준히 <민족21>에 글을 실었고, <민족21>이 방북취재 갈 때 동행해 갈 때도 많았다.
창간부터 친근한 매체였고, 새롭게 출범하는 2기 체제, 발행인이 초대 강만길 선생에서 명진 스님으로 바뀌면서 편집주간으로 합류하면서 <민족21>을 맡아보게 된 거다. 6년째 접어들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새로운 세대를 양성하는 과정을 겪어서 세대교체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올해로 결혼 19년인데 이틀 연속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어본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다. 19년동안 새해 1월 1일 외박한 게 10번은 된 것 같다. <중앙일보>에 있을 때 원래 토요일이 쉬는 날인데 토요일 대부분을 출근했던 것 같다. 출근해야만 내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민족21>에 들어와서는 더 심해진 것 같다. 한달에 한번 정도 가족이 식사한 적도 있는 것 같다. 가족들에게는 미안하다. 그래도 <민족21> 만들고 글을 쓰고 민족문제에 대해서 강연을 하는 것이 당위적인 사명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떻게 보면 개인적으로는 재밌다. 그 자체가 내 인생의 40대를 결산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생각한다.
□ 이 기회를 빌어 같이 해오신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 <민족21> 10년 동안에 열정을 바쳐서 함께 하셨던 분들이 참 많다. 초대 신준영 편집국장, 2대 김지형 편집국장, 안영민 편집주간, 정용일 편집국장 등 헌신적인 노력 하나하나가 모여지고 그동안 <민족21>을 거쳐 간 많은 기자들의 헌신을 통해 오늘까지 올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민족21>을 지키고 좀더 좋은 잡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전현직 기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 외에 여려가지 어려운 조건이 있지만 창간 초기부터 지금까지 편집기획위원 참여해주면서 조언과 자문을 해주신 전문가와 학자들에게도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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