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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는 인생, 한국의 탈북자를 추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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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8-18 09:22 조회1,0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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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8-17 22:05 
[한겨레] 한국서 17년 ‘발버둥’…“지금은 떠날 생각뿐”

그들의 땅은 어디에

1994년 북 벌목공, 망명 수용

북·중·러 반발속 정치적 활용

국내 탈북자 현재 2만918명

1994년 8월22일, 대한항공 924편은 모스크바를 출발해 김포공항을 향했다. 깜박 잠든 한철길(52)씨를 옆자리 탑승객이 깨웠다. “텔레비전에 당신 사진이 나와요.” 기내의 작은 화면에서 한씨는 제 얼굴을 보았다. “현재 모스크바를 출발한 한씨의 건강상태는 양호합니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말했다. 낮 12시35분, 공항 입국장에서 한씨는 취재진의 수많은 플래시에 둘러싸였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한씨는 러시아 벌목장 출신 탈북자다. 1985년부터 러시아 연해주 삼림지역에서 일했다. 그는 영화기사였다. 벌목장을 다니며 영화를 틀었다. 장사도 했다. 벌목장 밖에서 담배 등을 구해 벌목공에게 팔다가 북한 보위부의 조사를 받게 됐다. 1986년, 27살의 한씨는 벌목장을 탈출했다. 8년 뒤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는 ‘러시아 벌목공’으로 소개되어 기자회견에 나섰다. 당시 러시아 벌목공(출신 탈북자)은 북한의 인권유린을 웅변하는 존재로 통했다.

한국 생활은 올해로 17년이 됐다. 그 세월 동안 한씨는 사무직, 건설현장 막노동, 식당 점원, 다단계 판매원, 옷장사 등을 거쳤다. 북한 실태에 대한 강연을 하며 돈을 벌기도 했다. 요즘 그는 서울 어느 아파트 단지의 전기기사로 일한다. “돈 없으면 지옥 같은 이 나라에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발버둥을 쳤어요.” 발버둥 끝에 한씨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지금은 그냥 (한국을) 떠날 생각뿐입니다.”

탈북 1세대인 한씨는 2만여명에 이르는 국내 탈북자의 처지를 웅변한다. 지난해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국내 탈북자 경제활동인구 10명 중 1명은 실업 상태다. 취업 경험이 있는 탈북자의 63.4%는 한 직장에 1년 이상 다니질 못했다. 80.4%는 근로소득액이 150만원 이하다. 탈북자는 한국 사회 최하층을 이룬다. 성공적 정착자가 없지 않지만 매우 드물다. 러시아 벌목공으로 대표되는 탈북 1세대의 실패를 다른 탈북자들도 따라 걷고 있다.

2011년 3월 현재, 국내 거주 탈북자는 2만918명이다. 탈북자의 국내 입국은 2000년대 들어 본격화했다. 2006년부터는 매해 2000~3000명이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 연해주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다 탈출한 북한 주민들이 그 서막을 열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북한과 러시아는 벌목협정을 맺었다. 러시아는 영구 동토의 혹독한 환경에서 벌목 작업을 할 노동자가 필요했고, 북한은 외화수입이 필요했다. 그 절정기인 80년대, 연해주에서 일하는 북한 벌목공은 2만~3만명에 이르렀다.

70년대 한국의 중동 건설 노동자에 비견되는 북한 벌목공들은 90년대 이후 난관에 부닥쳤다. 91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고 인플레가 심해지자 북·러 당국이 벌목공 규모를 축소했다. 예전 같지 않은 벌이와 감원에 불만을 품은 북한 벌목공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94년 초, 한국의 보수언론이 북한 벌목공이 지내는 합숙소 등을 “인권유린의 수용소”라고 보도했다. “과장된 증언”이라는 비판도 제기됐지만, 김영삼 정부는 작업장을 나와 떠도는 벌목공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북핵 관련 남북 긴장이 높아지던 때였다. 북한은 “(벌목공의 망명을 허용하면) 납치로 간주하겠다”며 반발했다. 러시아는 “망명을 원하는 북한 벌목공이 러시아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겠다. 다른 나라의 개입은 필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94년 5월, ‘망명자’ 신분으로 북한 벌목공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국내적으로는 ‘북한의 인권유린’이 사회의제로 부각되는 동시에 공안정국이 시작됐다. 대외적으로는 한-러, 남북 관계 모두 경색되면서 한반도 주변에 긴장이 흘렀다. 김영삼 정부가 탈북자를 ‘정치적 카드’로 활용해 남북대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때부터 북한 주민들에겐 ‘북한 탈출-러·중 체류-한국 입국’의 탈북 경로가 생겼다. 북-중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탈북부터 한국 입국까지 안내하는 브로커가 등장했다. 한국 선교단체·보수단체들도 중국 동북 지역에서 탈북자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입국한 벌목공들에게 임대아파트와 정착금을 주고 직업을 소개해줬다. 1994년은 탈북자를 둘러싼 모든 문제가 잉태된 시기였다.

그런 면에서 러시아 벌목장에서 탈출해 한국에 들어온 한철길(52)씨의 지난 17년은 한국 거주 탈북자의 실상을 웅변한다.

한씨가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에는 ‘기획 탈북’의 그림자가 있다. 러시아 극동 하바롭스크 삼림지역에서 일했던 한씨는 1986년 벌목장을 탈출했다. 그 뒤 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연해주 등을 떠돌았다. 93년 러시아 정부의 도움을 받아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고려인 아내를 만나 농사지으며 살았다. 탈출 이후 8년 만에 한국에 들어온 배경에는 한국 대사관이 있다. 94년 초,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직원이 한씨를 찾아왔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나한테 ‘한국에 가자’고 하더라고요.”

입국 이후 탈북자의 첫 임무는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일이다. 입국 직후 한씨는 다른 벌목공과 함께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에 나갔다. 한씨의 첫 직업은 통일부 홍보 강사였다. 대학과 경찰서를 다니며 전쟁 대비책을 강연했다. “원고는 경찰이 써주고 1시간에 10만원을 받았는데, 따라다니는 형사 2명의 밥값을 계산하면 5만원 남더라고요.”

입국한 탈북자에게 한국 정부는 정착 지원금을 주고 직업을 소개한다. 극빈층에 준하는 지원이다. 풍요로운 삶을 기대했던 탈북자들은 종종 실망에 빠진다. 입국 당시 한씨는 15평 임대아파트 보증금 900만원과 정착금 300만원을 받았다. 한씨는 정착금으로 중고 텔레비전과 밥그릇을 샀다.

탈북자들의 고민은 취업 직후부터 본격화된다. 그들은 한국인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감을 느낀다. 직업학교에서 자격증을 딴 한씨는 한국전력공사에 취직했다. 동료들은 회식 자리에 한씨를 부르지 않았다. “저 사람은 스파이”라며 숙덕이는 소리도 들었다. 한씨는 취업 4년여가 지난 2000년에 사표를 냈다. 함께 직업학교에 다니며 자격증을 딴 탈북자 19명에게 연락해봤다. 그들 역시 회사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둔 상태였다.

달리 기댈 곳 없는 탈북자들은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돈이 필요했던 한씨는 다시 강연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교회에서 일자리를 줬다. 한달에 50만원을 받고 교인들 앞에서 북한 실태를 얘기했다. 교회는 더 큰 일을 요구했다. 러시아에 선교사로 나가라고 했다. 한씨는 교회 일을 그만뒀다.

탈북자들은 결국 몸으로 돈 버는 생활을 시작한다. 한씨는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식당에서 설거지도 했다. 사무직 일을 하고 싶었지만, “북에서 왔다”고 하면 고개부터 가로저었다.

착실히 돈 버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탈북자들은 종종 일확천금의 유혹에 빠진다. 어느 날 한씨에게 낯선 이가 찾아왔다. 러시아 수출용 의류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또다른 이는 다단계 판매를 권했다. 한씨는 ‘판매에 성공한 탈북자’로 소개되어 다단계 판매 회사의 강사로도 일했다. 수백만·수천만원이 오가는 일에 잘못 연루되어 한씨는 고소를 당했다. 결국 사기죄로 감옥까지 다녀왔다.

숨가쁜 17년이 보람 없이 지나가는 동안, 담당 형사의 소개로 만난 한국인 아내와도 멀어졌다. 이제 아파트 단지 전기 기사로 일하는 그는 제 인생의 실패를 인정한다.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자꾸 치민다. “친척이 있어요, 동창이 있어요? 워낙 바닥부터 시작하지, 비빌 데는 없지…. 외톨이가 되니까 점점 폐쇄적이 되고, 한국 사람이 볼 땐 별거 아닌 걸로도 상처 받고….”

얼마 전, 한씨는 옛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1994년 입국 당시 한씨는 다른 벌목공 8명과 함께 기자회견을 했다. 연락 닿는 이들에게 어찌 지내는지 물었다. 그들은 시골 방앗간에서 기름을 짜거나, 아파트 쓰레기 수거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밑바닥 인생을 살더라고요. 오래 있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지요.” 한씨는 쓰게 웃었다.

정착금 등 줘도 극빈층 수준

차별·경쟁 심해 적응에 실패

‘빈곤 대물림’ 사회에 절망감

한국 거주 탈북자의 ‘누적된 실패’는 2000년대 중반부터 탈북자의 제3국행으로 이어졌다. 그 이면에는 ‘가족 탈북’이 있다. 초기에는 혈혈단신 탈북이 주를 이뤘다. 이후 ‘나홀로 탈북자’들이 북한의 가족·친척을 한국에 데려왔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2세도 태어났다. 자녀를 둔 탈북자들은 밑바닥 인생을 오래 인내하지 않는다.

 

장희순(가명·44)씨는 9살 딸을 위해 미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일찍 깨친 (탈북자) 엄마들은 애 데리고 2007년 무렵부터 영국에 많이 갔어요. 거긴 북한 사람에 대한 색안경도 없고 차별도 없고 그렇게 좋다고 그래요.” 요즘은 영국 망명이 힘들다. 그래서 미국을 택했다. 내년에는 출국할 생각이다. “우리야 한국에서 고생하며 몸으로 때울 수 있지만, 아이들까지 그럴 순 없어요.”

이 대목에 이르러 한국 거주 탈북자의 고민은 한국 빈곤계층의 처지와 겹친다. 한국의 빈곤은 구조적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한국의 빈곤은 대물림된다. 자녀까지 저학력·저소득 계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탈북자들이 생각하는 해법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다.

최근에는 서로 다른 출신이 섞인 탈북 가족이 등장하고 있다. 최진선(가명·57)씨는 2002년 탈북 직후 중국에서 조선족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딸을 업고 타이를 거쳐 2007년 한국에 왔다. 한국 국적을 얻은 뒤 중국의 남편을 초청했다. 최씨에겐 북한에 있던 시절 결혼해 낳은 아들도 있었다. 2009년, 1200만원을 들여 북에 있던 19살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중국에서 나고 자란 남편, 탈북하여 중국 생활을 경험한 아내,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 북한에서 나고 자란 아들이 모여 가족을 이뤘다. 남편과 아내는 둘 다 몸이 아프다. 빈곤계층에 지원하는 최저생계비 130만원으로 한달을 산다. 자녀들 역시 한국의 경쟁적 교육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러시아로, 차라리 북으로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는게 꿈

정부지원책은 울분만 남겼다

러시아 벌목공 논란 이후인 1997년, 한국 정부는 ‘북한이탈주민 보호·정착 지원법’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모두 9차례 개정했는데, 자립·자활능력을 배양하는 데 초점을 둔 뼈대는 변하지 않았다. “워낙 바닥부터 시작한다”는 한철길씨의 울분은 정부 지원책의 실제 효과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탈북자들은 한국 사회 하층의 바닥에서 좀체 헤어나지 못한다.

한씨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는 게 꿈이다. “안되면 북한에 다시 들어가든지….” 체념한 표정으로 한씨가 말했다. 최진선씨는 미국에 있는 탈북자 친구에게 전화 거는 일로 요즘 바쁘다. “거기 가면 나 같은 아줌마도 월 300만원은 버는 것 같아요.” 최씨의 꿈은 미국에 가는 것이다. 17년 전, 러시아 벌목공에서 비롯한 탈북의 행렬은 ‘다국적 탈북자’ 가족 시대를 거쳐 미국행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것이 진화인지 퇴화인지 구분해주는 전문가를 취재 내내 만나지 못했다. <끝>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사진 강재훈 김태형 송경화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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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한결같이 불안정한 삶…얼굴 노출 원치 않아

6월 중순 짧은 외신 기사를 봤다. “미국에서 탈북자가 부인을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정이 궁금해졌다. 유엔난민기구(UNHCR)와 미국·캐나다 등 각국 정부의 자료를 살폈다. 생각보다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이 아닌 제3국에 머물고 있었다. 국내 거주 탈북자 및 관련 단체를 만나고 해외 탈북자 협회, 탈북자 지원 단체, 선교 단체, 변호사를 접촉했다.

7월 말, 국내 거주 탈북자, 한인 선교단체 등을 통해 소개받은 탈북난민 및 탈남 탈북자를 미국 현지에서 만났다. 기사에 등장하는 탈북자를 직접 만난 것은 물론 이웃 탈북자, 선교단체, 한인회, 한인 교회, 한인 가게, 현지 기자 등을 만나 사실 관계를 재차 확인했다. 열흘 동안의 현지 취재 이후에는 전화·전자우편·인터넷 메신저 등으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 인권 및 탈북자 문제는 이념에 속박된 쟁점이다. 취재 전반에 걸쳐 이념의 틀을 벗어나 보편적 인권 차원에서 탈북자 문제를 다루려 애썼다. 인권은 소외·억압당하는 개인에 주목하는 시선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만난 탈북자들의 삶은 극적이고 다양한 사연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불안정했다.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이웃 탈북자의 부러움을 받는 이들조차 사회적·경제적 곤란을 호소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북한·중국·미국 정부와 교회를 필두로 하는 주변 한인의 시선에 민감했다. 익명을 쓰는 등 그들의 신분을 최대한 가렸으나, 기사에 등장한 어느 탈북자는 “모자이크 처리한 사진도 (신분 노출로 이어질까) 걱정된다”고 연락해왔다.

부정적 측면만 강조한 기사 아니냐는 몇몇 독자가 있었다. “한국 사람들도 살기 힘든데 그 정도 지원을 받고도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반응하는 누리꾼도 있었다. 반면 탈북자들을 돕고 싶다는 국내외 독자의 문의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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